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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약 체험기

약과 심리학?

눈이 엄청나게 온다. 
창가에 책상이 바로 붙어 있으니, 책상 앞에 있으면 늘 눈을 맞고 앉아 있는 착각이 든다. 
Snow storm이 온다 하여 오늘 있던 영어회화 수업은 일찌감치 휴강되었고... 덩달아 수영 가기도 귀찮아져서 책상 앞에 앉았다.


에피소드

여러 차례 얘기한 적이 있는 일화이다. 일년차로 약국 근무를 하던 때이다. 위장약을 2주치 받아갔던 할머니가 다시 같은 처방을 갖고 오셨다. 여느 때처럼, 약을 잘 드셨는지, 좀 나아지셨는지, 불편한 건 없으신지(부작용은 없는지) 체크를 하는데... 불편한 게 있으시단다. 당신은 원래 밥을 하루 두 끼만 먹는 사람인데 약을 '하루 세 번' 먹자니, 밥도 '하루 세 번' 먹어야 해서 너무 힘이 든단다. 

요즘 사람들은 식사가 규칙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편의상 '1일 3회, 식후 30분'으로 하던 복약지도가 불편을 야기하는 일이 많다. 그래서 반드시 식후에 먹지 않아도 되는 약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미리 얘기를 한다. 전달이 잘 안 된 모양이다. "지금 드시는 약은 위장보호제라 반드시 식사 후에 드실 필요는 없다."고 다시 한 번 말씀드려 보내었다. 그런데 이 일은 생각할수록 재밌고 신기하더라. 약이 사람의 생활을 통제하고 있는 그 모습이.

약물이 주는 심리적 영향

당연히 약물은 화학물질, 잠재적인 독성물질이어서 사람의 몸에 영향을 미친다. 질병을 낫게도 하고, 증상을 줄여도 주고, 알러지나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것이 가장 과학적인 관점이고 가장 일반적인 관점이다.

또 약물은 사람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준다. 경우에 따라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약물을, 경제적인 이유로구하지 못하는 경우에 대해 대체로 사람들은 분개한다. 건강보험과 같은 보건의료제도가 비판받기도 하고, 제약회사가 폭리를 취하는 구조가 지적되기도 한다. 사회정의의 측면에서 자주 다루어진다.

쉽게 간과되는 부분인데, 약물이 사람에게 심리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그 영향은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약을 먹는 행위'가 마치 건강에 있어서 안전지대에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켜서 불건강 행태를 하는 것이 그런 사례다. '술약'을 먹고, 자신감에 더 과음을 한다던가 하는 경우다. 위장약을 먹기 위해 식사를 한 끼 더 챙겨 드신 할머니의 경우도 그러하다. 복용법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생활에의 불편을 감수하신 셈이다. 

이런 약물의 심리적인 영향을 늘 궁금해 하였는데, 별로 다루어지는 일이 없어 아쉬웠던 차였다. 그동안 시간 날 때 읽겠다고 모아둔 글이 몇 개 있었는데, 그 중 하나, 약물의 심리학적 영향을 다룬 논문이 있어 옮긴다.


질적연구로, 여성 노인들에서 나타나는 '약물에 대한 심리적 의존'을 '약물 얽매임'으로 정의하고, 그것을 구체화해 내었다. 요약하면 이렇다. 노인들은 노년기가 되면서 삶의 불확실성과 육체적 한계를 자각하고, 위기상황(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면서, 약에 대한 집착과 의존(약물 얽매임)을 보이게 된다. 약물이 주는 심리적 안정감, 편안한 삶과 죽음에 대한 기대, (자신의 불건강으로 인한) 가족의 부담을 방지하기 위해, 약물 얽매임은 지속되고 심화된다.

노인들의 '약물 얽매임'은 실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처방약이나 비처방약이나 상관이 없다. 어떤 이는 진통제를, 어떤 이는 종합감기약을, 대부분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의존한다. 심지어 효과나 의학적 필요는 상관없다고까지 한다. 마음이 불안해서 안 되겠다는 거다.

"약을 안 먹으면 안 되지. 꼭 먹어야지 하고 자꾸 강박적으로 생각을 하는 거야. 안 먹으면 내 병이 더 악화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지. 안 먹을 수가 없어. 불안하죠. 나이는 80 다 먹었는데 어떡허나? 그런 생각이 들죠... 약도 먹어 봐야 별 거 없어. 그저 습관성으로 안 먹을 수는 없고 그 약을 안 먹으면 불안하고 궁금하고 그러니까. 불안하다고 안 먹으면 더 나빠질까 봐. 그래서 이 약을 먹어야지. 별로 효과가 없는데도 먹어야지 그러고 그냥 먹는 거야. 안 듣든 듣든 간에 안 먹으면 서운하고 불안해. 그러니까 첫째 마음이 불안해서 안 되겠드라고."


또 눈에 띄는 것은 '가족 부담에 대한 예방' 차원에서 약에 집착하게 된다는 것. 

"내가 이런 건 자식들한테 또 물려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죠. 그러니까 내가 건강해야 된다 이런 생각이 들죠. 내가 약을 먹으면서 이만큼씩이라도 살아서 우리 영감님이 저렇게(뇌졸중과 치매에 거동이 불편함) 살다가 내 앞에 죽어야지. 그래서 시방 영감님이 돌아가신다 해도 그렇게 원통하지도 않어. 내 앞에 돌아가셔야 팔자 편안하고 나도 자식들한테 그런 거 안 물려주고. 그래 내가 어떻게라도 몸이 아프고 귀찮아도 운동하고 약 열심히 먹는 거여. 자식들한테 그런 꼴 안 물려 줄라고 아주 그걸 내가 결심을 하고 있다고. 애들이 때되면 '엄마, 병원 날짜 잊어먹지 말고 가' 그러고 '다음 언제까지야'라고 전화로 미리 알려주지. 그리고 우리 애들이 매주 주일마다 와서요 '엄마 약 잘 잡수고 계시죠?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뭐 필요한 거 없으세요?'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하라고 그러고."

참 한국적인 요인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서구사회의 개인주의와 대비되는 가족주의적인 사고를 지적했다. 구조적인 부분도 끌어낼 수 있을 것 같다. 복지체제가 빈약하고, '노화'와 '불건강'에 대한 책임을 사회가 부담하기보다는 개인이, 주로 가족이 부담하는 우리나라. 


환자가 본인이 겪게 되는 질환과 '관계맺기'를 하는 것처럼, 약물과도 관계맺기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점에서 이 논문이 반갑다. 이걸 보고 나니 여러 가지 질문이 더해진다. 그래서 좀 더 연구해보았으면 좋겠다. 연구대상을 달리 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고, 사회문화적인 분석도 해 보면 좋겠다. '약물얽매임'이 아니라 '약물기피', '약물 두려움' 같은 현상이 있다면 그것도 보고 싶다. 한국사회의 특징적인 부분을 찾아봐도 좋겠다. ㅎㅎ 암튼 욕심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