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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약 체험기

약사인 내가 모르는 몸의 문제들

에피소드1. 
시험에서, 처음 보는 재밌는 문제를 만났다. 나중에 답을 찾아보니 오답을 쓰긴 했는데... 흠...
영어로는 Ear wax. 전문용어로는 Cerumen에 대한 문제였다. 처음 Cerumen을 봤을 때 뭔 뜻인가 했고, 보기가 엄청 길어서 좌절감이 엄습해 왔다. '또 찍어야 되나'... 헌데 가만 읽어보니 이거, 귓밥이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그렇지, 이것도 약사들이 알아야 하는 것이지...' 
문제를 풀며 처음 알았다. 한두 방울 귀 안에 떨어뜨려 두면 귓밥이 절로 빠져 나오는 약물이 있는지, 면봉을 쓰면 안 된다든지 하는 것들을. ;;; 

에피소드2. 
특히 1년차 약사 때, 학교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약국에서 환자를 대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 파킨슨병 치료제, 마취제, 정신분열 치료제, 고혈압 치료제, 항암제, 그렇게 많은 것을 배웠는데, 나는 환자들 앞에서 무력했다. "티눈이 생겼는데요...", "햇볕에 많이 탔어요..", "애가 밥을 잘 안 먹는데요...", "봉침을 맞고 부작용이 생긴 것 같은데..."... "네네, 그러시군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하고는 조제실로 들어가 선배한테 물어보기의 반복... ;;;


'일상생활에 불편을 야기하는 사소한 몸의 문제들'에 대해서 나는 참 몰랐다. 
물론 지금은 그 때보다는 아는 게 많아졌지만 여전히 모르는 게 많다. (cerumen 문제엔 오답을 썼다.;;)

나는 왜 그렇게 모르는 게 많았던 걸까? -_-

첫번째 이유는 우리 대학의 커리큘럼에서 과학/공학적인 면이 강조되고, 치료/상담 부분이 약해서이다. 
캐약 시험을 위해 "Patient self care'를 공부하고 있는 이제서야 약물요법 외에 환자들이 취할 수 있는 전략(Non-pharm)을 배운다. 특히 의사를 만날 필요가 없이 일반의약품이나 생활요법으로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유용하다. 무좀, 니코틴 중독, 콘택트렌즈케어, 치질, 체중관리, 영양, 피임, 폐경, .... 약사생활을 하다 보면 '공부하지 않을 수 없어서' 케이스별로 각개격파를 통해 알게 되는 지식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캐나다 베이스라서 한국에서 활용하기는 맞지 않는 면이 있지만, 그래도 참 고마운 책이다.

두번째 이유는 내 나이가 어리고, 내가 건강해서이다.
기껏 해야 스물네다섯의 건강했던 나는, 기껏 알러지비염 외에는 크게 아파본 경험도, 의료서비스를 이용해본 적도 없어서 사람들의 몸에 대한 다양한 호소를 진지하게 고민해보지를 못했었다. 일단 문제의 양적으로도 그러하거니와, 이 사람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몸의 이야기를 이해하기에는 나의 역량이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 한 마디로 연륜이 부족해서..

세번째 이유는 '건강'과 '불건강'으로 이분되지 않는 어중간한 몸의 문제가 너무나 많은 것이 한 몫한다.

1. 일상 생활에 지장을 초래한 질병의 상태(불건강)
2. 사소한 몸의 문제들로 인해 성가신 상태
3. 완전한 건강 상태(건강)

몸의 상태를 이렇게 분류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3에 있던 사람이 1의 상태로 곧장 가기도 하고, 3->2->1의 순서를 거쳐 병이 발전하기도 하고, 병이 발전하지 않고 2의 상태에 계속 머무를 수도 있다. 태어날 때부터 1이나 2의 상태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찌됐든, 1의 상태는 주로 의학(약학도 마찬가지)이 대상으로 삼는 영역이다. 학교에서 주로 배우는 부분들. 3의 상태는 개념적인 것이 되는데 설명하기가 쉽지 않고 아직까지 그 정의도 논란이 많다. 심지어 '달성할 수 있는 상태인가'에 대한 논란도 많다. 그냥 몸에 아무런 문제가 없이 건강한 상태라고 하자.

문제는 학교에서 '심각한 비정상'에 해당하는 1의 상태에 대해서만 주로 배운 것에 있다. 하다 못해 1의 상태를 구분짓는 2와 3의 상태가 무엇인지라도 좀 배웠으면 좋으련만 학문은 별로 거기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2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특히 약국에 많이들 오는데, 다행히 2에서 3으로 가는 과정에 작용할 수 있는 좋은 '제품'(약이든 약이 아니든)이 약국에 있으면 부드러운 대화를 할 수 있고, 판매로 이어지고, 사용법이나 주의사항을 상담하면서 잘 마무리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제품'이 없는 경우... 잡학과 상식이 동원되다가, 약국에 온 사람은 실망하기도 하고, 그러면 나도 나에게 실망하고... 뻘쭘하게 끝이 난다.

제너럴 닥터 선생님은 문턱이 낮은 진료를 표방하다 보니 "뱃속에서 꿀렁꿀렁 소리가 나요."와 같은, 의료에서 문제삼지 않는 몸의 문제들을 자주 상담하시는 것 같은데 이 때 동원되는 지식은 어떤 것일까? 궁금해서 한 번 물어보고도 싶다.


사족 - 갑자기 떠오르는데 'Patient self care'의 한국판을 만든다면 이 챕터를 반드시 추가해야 한다.
"숙취". 우리나라 약국 이용 목적의 상위레벨이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