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1년에

아프다..

젊은 여작가가 월세방에서 굶어 죽었다. 

또래 여성 작가의 안타까운,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죽음에 뭔가 말을 보태기에는,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 그래서 댓글 하나 다는 것도 참 망설여진다. 그 사건이 '니가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다가는, 너 이렇게 굶어 죽을 수도 있다'는 위협의 메세지로 읽히는 수많은 젊은 예술가들(김사과의 글)에 비해, 나는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 와도 굶어 죽을만한 사회경제적 위치에 놓여 있지는 않은 것 같아서, 무슨 말을 갖다 놓기에도 민망하다.

다만, 그 일은 나에게 충격이다. 굶어죽다니. 굶어죽는 빈곤이라는 것이, 지금과 같이 풍요로운 세상에 아직도 있다는 것도 그렇다. 몇 년 전인가 이화동 어느 골목 앞 편의점에서, 음식쓰레기를 뒤지던 할머니를 본 적이 있다. 늦은밤 문득 요플레를 먹고 싶다고 떠올린 내 자신이 심히 무안하도록, 자기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을 내팽개쳐야 할 정도로 심각한 빈곤이 있다는 사실에 당시에도 큰 충격을 받았었다. 

같은 사회의 구성원이 쓰레기를 뒤지도록 내버려두는 사회, 아파서 죽고 굶어서 죽어도 모른 척 하는 사회. 이것만으로도 할 말은 너무나 많지만...

백번 양보해서, 할머니의 빈곤은 사회에서 낙오한 탓이라 치자. 할머니는 못 배웠을 것이고, 모아둔 돈이 없을 것이고, 당신을 부양할만한 능력을 가진 자식도 갖지 못했을 터이니, 못나서 그런 것이라 치자. 그러니 애초부터 열심히 노력해서 실력을 갈고 닦아 경쟁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라 치자.

그런데 그녀의 죽음은 여기서 더 큰 충격을 더한다. 학벌과 재능, 더럽고 치사하지만 사회가 요구하는 것들을 다 갖추고 있었던 그녀도 그런 불행의 주인공이 되었다. '자신의 능력껏 그에 응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꼬드김이, 실상은 다 허상이었다. 사회가 요구하는 스펙을 갖추고, 성실하게 노동을 하더라도 죽/을/ 수/ 있/다...

아프고 괴롭다. 소박하게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일이, 자아실현이거나 행복이 아니라, 죽음을 불사한, 피가 튀는 투쟁이어야 한다는 것이. 같은 시대를 함께하는 사람으로서 서로 독려하지 못하고, 도리어 내 옷깃을 여며야 하는 상황이 말이다. 

나는 이 죽음 앞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가만 생각보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 나는 그저 독자로 가난한 작가의 책 한 권을 더 사면 되는 걸까. 이도 아니면 진보정당을 지지하며 소외된 이들을 위한 정책이 입법되기를 기다리면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