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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에

쪽글1. 자신이 살아온 삶의 묘사(크로키 기법)


우석훈 샘의 '사회과학 방법론' 강의의 숙제. 쪽글1.
자신이 살아온 삶을 크로키 기법으로 묘사하시오. 무겁지 않게, 길지 않게.

공간적 구분으로 내 삶을 살펴보면 이렇다.
부산의 모처들(16세 이전)- 부산 해운대(16-24세)- 울산(25-26세)- 서울(26-30세)
초중고교와 대학졸업까지 부산에서, 그 이후에 취업을 하며 울산으로, 학업을 시작하며 서울로 와 살고 있다.

사춘기 이전, 16세 이전까지의 내 삶은 그냥 고만고만한 학생이었다. 고만고만한 주택가에 위치한 고만고만한 초중학교를 다녔다. 초중학교를 다녔던 지역은 큰 산에 둘러싸여 있던 동네라 다른 지역과 교류가 더욱 없어서, 폐쇄적인 느낌이 강하고 조용한 동네다.
그래서였는지 중2 때 하이텔을 통해 PC 통신을 처음 시작했는데, 넓은 세상과 접하면서 깜,짝, 놀랐다. 세상이 넓고 사람이 많다는 걸 그 때 알았다. 사춘기도 그와 함께 왔던 것 같다. 문학동호회에 가입해, 시나 소설을 쓰는 언니오빠들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중3 때, 해운대로 이사를 오며 전학을 왔다. 교실 창문으로 바다가 보이는 학교였다. 아이들은 무척 개방적이고 자유로왔다. 처음 와서 했던 일은, 우리 반에서 준비한 연극 <데미안>에서 음향을 담당한 일이었다. 학생들이 연극을 만들고 연출하고 연기한다는 것이 그저 놀랍고 신기했다. 예민하던 시기, 하교길의 등산로에서 변태를 만나 성추행을 당한 후 우울증을 겪었던 것 같다. 친구들과 관계맺기가 힘들었고, 예민하게 날선 채로 졸업을 맞았다.

신도시 신흥 고등학교에 1회 입학한 나는 일을 벌이고 다니기 시작했다.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반에서는 토론 모임을 조직했고, 문예부에서 독립해 나와 문예창작부를 만들었다. 시낭송회를 다니고, 독립영화를 보고 비평도 했다. 고3 때는 학생들을 성추행한 담임 선생님을 탄핵(?)하는 일에도 관여했다. 우리반이 학교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학교는 우리 의견을 유연하게 받아주었고, 우리를 비난하지도 않았다. 건강하게 학교를 졸업하게 해준 우리 고교에 감사한 마음이다.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싶었는데, in-서울 대학에 못 갔다. 미련이 남아 재수도 했지만 결국 지방사립대 약학과에 복귀했다. 지방사립대이면서 약대생. 비주류이면서도 기득권이 보장된 그룹에 속해 살았다. 지금까지도 나의 정체성을 말하자면 그러하다. 2000년 이후 지방사립대에는 학생운동이라는 것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유시민이 제안한 개혁국민정당이, 당시 나의 정치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주었다. 그제야 정치와 만나고, 선거를 배우고, 부산을 알았다.

대학을 졸업하며, in-서울을 시도하기에, 나는 자본이 없었다. 울산에서 공동체 약국을 운영하는 선배들이 나를 받아주었다. 집도 주고, 충분한 월급의 직장도 주고, 어린 후배에 대한 애정과 배려도, 약사로 사는 모습에 대한 모범도 주었다. 이로써 내가 얻은 것은, 내 삶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보건정책을 공부하겠다는 나를 적극적으로 격려해 예상보다 훨씬 빨리, 약국경력 1년반만에 in-서울하여 공부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2006년 스물여섯에 서울로 왔다. 대학원에서는 보건사회학과 사회역학의 건강형평 개념을 배우며 삶의 지평이 넓어지는 경험을 했다. 사회단체를 통해 현장경험을 병행하며 조금씩 삶의 방향을 잡았다. 보건정책과 의약품이 만나 의약품정책 분야가 나의 분야가 되었다.

스물여덟, 대학원을 졸업할 때쯤엔 나의 이력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았는데, 내가 계속해서 싸워온 제약회사에는 차마 가지 못하겠고, 사회단체의 저임금을 감당하기에는 서울의 주거비용이 너무 비싸서, 또 작은정부를 표방하는 현정권이 공공기관 인력을 줄여나가기에, 나는 그 타협안으로 이익단체의 연구소를 택하였다. 실무에 소요되는 시간이 많았지만, 약국을 통해서는 배우지 못했던 '조직'을 배우고, 무엇보다도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이 큰 행운이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대학원 때 만난 인문학을 하는 영민한 청년과 결혼을 하여, 잠시 한국을 떠나는 결정을 하였다.

요즘 들어 느끼는 것인데, 삶의 어떤 결정을 할 적에도 나의 직업이 나를 더욱 용기있게 만들어 준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곳에서든 어렵지 않게 직업을 갖고, 또 어느 정도의 대우를 받으며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큰 힘이다. 약대를 선택한 순간부터 나는 이 유리한 카드의 달콤함을 선택한 것이다. 아직까지 이 직업에 대한 회의를 느낄만한 일도 없다. 오히려 지역에 기반한 공동체 약국과 약사 커뮤니티의 힘을 경험하였기에, 보다 희망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특히 의약품을 매개로 벌어지는 일들(개발, 생산, 소비, 분배,...)에 대해서는 더 많은 책임감을 발휘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약사-환자 관계나 지역 약국의 역할 등에 대해서도 좀 더 연구해보고 싶다. 같은 주제를 확장시켜줄 그룹이 함께 있기에 나는 더 복이 많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