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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에

뻔뻔해지기와 들이대기

캐나다는 아니지만, 한국 약사로서 외국에 정착한 어느 약사의 블로그를 가끔 본다.
이 분은 language problem이 거의 없으신 듯, 그 나라에서는 신참 약사이지만 한국에서의 경륜을 십분 활용하며,
본토인들에게는 흔치 않은(?) 근면성실+신속정확+친절까지 겸비해 아주 성공적으로 정착하신 것 같다.
외국에서 약사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로망을 완전히 현실화한 케이스라, 
존경과 경이, 호기심으로, 나와는 다른 삶을 그야말로 훔/쳐/보/게 된다. 

사실 훔쳐보기만 하는 것은 아니고, 나와 비슷한 상황에 감정이입도 하고, 어떤 때는 내 상황과 비교도 하며,
관찰하고 있다고 하는 편이 더 좋겠다.

나는 아직까지 면허를 받은 것도 아니고,
실기시험/영어시험/(어쩌면 IPG program)/Jurisprudence exam/Studentship/Internship까지 해치워야
전문가로 일할 수 있기 때문에 나한테는 요원한 일처럼 느껴지는 게 당연하기도 하겠다. 

오히려 나는 이 곳에서 지내는 시간이 가끔 '무한도전' 같다.
누구 말처럼 내 삶을 0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과도 같기 때문에, 아무래도 어려운 것들이 있다. 실은 많다.

영어가 부족해서, 이 곳 시스템/문화/관습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해서 알아듣지 못하고 놓치는 말이 많고,
머리 속으로 문장을 만들다 타이밍을 놓쳐서, 내 말에 자신이 없어서 저어하다가 적절한 대응을 못하는 때도 많다.
이런 상황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다 보면, 회피할 수 있다면 회피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토론토 Season II를 시작하며 '생활인'으로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내게 준 과제 중 하나는, 사회활동을 하는 것이다.
'뻔뻔해지기'와 '들이대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최근에 토론토 대학에서 외국 약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어 프로그램을 제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달 프로그램으로, 내가 발견했을 시점에는 거의 한 달 정도 진행된 상태였지만 망설임없이 등록했다. 

덕분에 무려 일본, 중국, 러시아, 인도, 이집트, 이란, 브라질, 멕시코에서 온 약사들과 일주일에 두 번씩 만나고 있다.
각자의 악센트로 하는 영어를 알아듣는 일이 처음에는 가장 큰 과제였고,
부끄러움을 극복하여 발표하고, 그들과 대화를 섞는 것이 다음 과제였다.

그리고 각자 이민/연수를 온 사연과 히스토리를 안고,
비슷한 문제들과 부딪치고 극복하며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이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중요한 성과였다.

이들 중 가장 악센트가 심해 알아듣기 어려운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중국과 브라질에서 온 이들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열 명 중 이 곳에서 직장을 갖고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이 두 사람 뿐이다.
한 명은 토론토 대학의 한 연구실에서 일하고, 한 명은 약국에서 pharmacist assistant로 일한다.
'뻔뻔해지기'와 '들이대기'가 나에게 필요한 전략이라는 것을 이 두 사람이 자꾸 내게 깨우쳐 준다.
더불어 어쩌면 나의 모국어, 그리고 나의 background가 나의 자산이 될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도 얻는다.

그래, 중요한 것은 조금씩 자신감이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감은 현실을 더욱 명료하게 바라보게 하고, 그래서 그것과 맞서게 하는가 보다.

이제는 이 곳에서 전문가로 인정받기 위해 거쳐야 하는 많은 단계들과 만만치 않은 비용들이 
나를 주눅들게 하고 부담스럽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있는 도약을 위해서 필연적인, 당연한 과정이라는 생각도 어렴풋이 하게 된다.

이번에 출산 준비를 하며 의사와 미드와이프를 번갈아 만나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의사건 미드와이프건 매우 표준화된 매뉴얼대로 나를 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이것은 어디에서나 동일한, 예측가능한 서비스가 제공된다는 의미였다.
약국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닐진대, 상당한 전문인력을 외국에서 수입(?)해야 하는 이 나라에서, 
필요한 교육과 검증의 과정이 필수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